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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

Balkan

발칸의 예루살렘

사라예보 · 모스타르

유럽

발행 2023년 01월 호

발칸의 여러 나라들은 오랜 세월 굴곡 많은 역사를 겪었다. 피와 눈물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지만 그 어느 지역보다 이야기와 예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등 발칸의 슬라브 국가를 둘러보며 드라마틱한 사건 현장과 예술 작품의 배경이 된 도시 속에서 피와 이야기의 땅인 발칸을 오롯이 느껴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매력을 지닌 도시다. 골목을 하나 꺾을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유럽풍의 건물과 튀르키예식 시장, 이슬람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고 사람들의 외모도 굉장히 다채롭다. 도시 곳곳에 솟아 있는 모스크의 첨탑과 정교회의 양파 모양의 지붕, 가톨릭 성당의 높은 종탑과 유대교 시나고그는 지척의 거리에 마주하고 있어 과연 ‘발칸의 예루살렘’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구시가의 중심인 바슈차르시아는 400년간 보스니아를 지배한 오스만튀르크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는 곳이다. 튀르키예식 시장인 바자르를 비롯해 색색의 양탄자와 유리등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고, 노천카페에서는 놋쇠 주전자로 끓이는 진한 튀르키예식 커피와 물담배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구리 접시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는 골목을 ‘장인 거리’라 부르는데, 대를 이은 마스터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금속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Michael Paschos / Shutterstock.com

뿐만 아니다. 세계 영화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축제 중 하나인 사라예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거리는 일 년 내내 화려한 영화 포스터와 유명 배우들이 남긴 흔적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이처럼 활기 넘치는 도시가 무려 4년간 완전 봉쇄된 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끔찍한 살육이 자행된 죽음의 도시였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어느덧 내전이 끝난 지 사반세기가 지났고 이제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도시이긴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여전히 사라예보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과 아픔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일단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곳곳에 펼쳐진 새하얀 묘지들을 마주치게 된다. 사라예보 시내와 외곽에는 정말 묘지가 많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묘지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석에 새겨진 생몰 연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1992년부터 1995년, 바로 사라예보 봉쇄 기간에 죽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도시 곳곳의 묘지와 함께 봉쇄의 쓰린 기억을 전하는 것 중 하나가 ‘사라예보의 장미’라 불리는 포탄의 흔적이다. 4년에 가까운 봉쇄 기간 동안 사라예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총탄과 포격이 쏟아졌다. 지금도 몇몇 건물과 길바닥 곳곳에서 당시의 총격이나 포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박격포탄이 터져서 여기저기 움푹 파인 자리에 붉은 페인트로 채워놓은 표식을 ‘사라예보의 장미’라 부른다. 로맨틱한 이름과는 달리 야만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라예보의 장미는 지금도 여전히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보스니아 제2의 관광지인 모스타르에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 ‘스타리 모스트’가 있다. 그러나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던 모스타르도 비극을 피할 수 없었고 크로아티아군의 폭격으로 스타리 모스트는 산산이 부서진 채 무너져 내렸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스타르의 가톨릭 마을과 무슬림 마을을 이어주고,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평화롭게 연결시켜주던 다리가 무참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에서 도착한 기부금으로 스타리 모스트는 재건되었고, 복원된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금도 이 다리는 모스타르 관광의 핵심이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포토존이다. 여름이면 전문 다이버들이 저 아래 네레트바 강으로 수직 낙하하며 관광객들의 돈과 박수를 쓸어가고, 다리 양옆으로는 모스타르 특산품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해 있어 언제 봐도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그 한쪽에는 ‘Don’t Forget 1993’란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말없이 서서 이 다리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 에디터 최인실
  • 김주연(<슬라브, 막이 오른다> 저자)
  • 사진 김주연, AB-ROAD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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