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 말레이시아 > 멜라카
발행 2022년 11월 호
팬데믹은 도시를 위축시킨다. 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염병의 위세가 잦아들면 도시는 이내 곧 회복력을 발휘한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훨씬 나아진 모습으로 말이다. <메트로폴리스> 저자로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 벤 윌슨은 “팬데믹이 지나면 도시는 걷고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는 형태로 진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러스의 위세로 밖에 나가지 못하고, 또 모이지 못했던 방역에 대한 반작용이지 않을까 싶다. 말레이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시가 다시 활기를 더해가고 있다. 주민과 관광객이 거리와 골목을 채우고 많은 이들이 시장과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 말레이시아로 떠난 여정.
말라카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비단, 직물, 도자기를 실어오려면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사이 바닷길, 즉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했다. 말라카는 해협 북쪽 말레이반도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16~18세기 동서 무역을 독점하고자 차례대로 말라카를 점령하기도 했다. 서구 열강이 점유하기 전까지 말라카는 술탄이 통치했고 아랍, 페르시아, 중국, 인도, 필리핀, 태국, 유럽 상선들이 드나들던 자유무역항이었다. 4개 국가가 항만 관리인을 상주시켰고 84개 언어가 쓰였다고 하니 명실상부 글로벌 무역 허브로 불리기에 손색없다.
말라카 시가지에는 이슬람, 힌두교, 불교, 도교 사원이 사이좋게 벽을 잇대어 붙어 있다. 도심에는 1753년 지어진 기독교 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그곳에 기댄 언덕에는 포르투갈인이 지은 가톨릭 성당이 말라카 강을 굽어보고 있다. 전 세계 종교 사원이 시가지에 빽빽이 밀집해 있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말레이시아 원주민(부미푸트라, 줄여서 부미)부터 중국, 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유적이 뒤엉켜 종교와 문화의 ‘만화경’을 이루고 있다.
말라카 시가지에는 이슬람, 힌두교, 불교, 도교 사원이 사이좋게 벽을 잇대어 붙어 있다. 도심에는 1753년 지어진 기독교 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그곳에 기댄 언덕에는 포르투갈인이 지은 가톨릭 성당이 말라카 강을 굽어보고 있다. 전 세계 종교 사원이 시가지에 빽빽이 밀집해 있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말레이시아 원주민(부미푸트라, 줄여서 부미)부터 중국, 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유적이 뒤엉켜 종교와 문화의 ‘만화경’을 이루고 있다.
말라카 시내에는 토사를 잔뜩 머금은 물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말라카 강은 북쪽 네게리 셈블란 주에서 발원해 40km를 흘러 말라카 해협으로 흐른다. 강폭은 15m 남짓으로 좁지만 수량은 풍부하다. 15세기 술탄이 말라카를 지배하던 시절부터 이 강은 주요 무역로로 쓰였다. 대륙을 오가는 상단이 해협에서 강으로 들어와 물자를 싣고 빠져나갔다. 지금은 관광객을 태운 소박한 유람선이 강을 오르내린다. 강물은 자유분방하게 떠돌지 못하고 벽돌과 시멘트로 쌓은 제방에 갇혀 흐른다. 제방에 잇닿아 카페, 식당, 술집이 줄지어 이어져 있다. 강으로 난 노천 의자에 앉아 맥주나 음료를 마시는 주민이나 관광객을 볼 수 있다. 주말 나들이 나온 부미들이 둑에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웃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강 서쪽 마을에는 좁은 길들이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아랍 이주민과 섞여 살아간 부미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이 길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잘란(말레이시아어로 거리) 퉁탄첵록에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옥의 현판마다 흘려 쓴 한자가 눈에 띈다. 히어렌 스트리트(Heeren Street)라 불리는 이곳에는 중국 이주민과 부미의 문화가 섞여 있다. 중국 남자 바바가 오래전 말라카로 이주해 부미 여자 뇨나와 결혼해 살았다는 전통 가옥도 남아 있다. 지금은 개인 박물관으로 개조해 옛 말라카 가옥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거리에는 집, 음식점, 불교 사원, 숙박시설이 중국식으로 지어졌지만 각 현관에는 말레이시아 국기가 펄럭인다.
몇 블록 지나 길 어귀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잘란 항제밧(존커 스트리트)이라는 이름의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진다. 기와지붕을 얹고 붉은 기둥으로 치장한 관문이 요란해 보인다. 차이나타운에서는 관음보살이나 관우를 모시는 중국식 사당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항제밧 거리에 자리한 첸훈텡 사당이 가장 오래됐다. 사당 한복판에 있는 향로 앞에서 향을 태우며 합장하는 화교들을 볼 수 있다. 지척의 거리에는 무슬림 사원이 자리해 있다. 무슬림 사원치고는 작고 낡아 보이지만 미나렛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는 도시를 가득 채운다.
무슬림 사원 옆에는 힌두교 사원이 벽을 사이에 대고 잇대어 있다. 회교와 힌두교 사원이 붙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이다. 말라카 사람들은 중국 사당부터 무슬림, 힌두 사원이 이어지는 거리에 하모니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투지 말고 조화롭게 어울려 살라는 지혜를 담고 있다.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캄풍 훌루 모스크가 나온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무슬림 사원이다. 다른 무슬림 사원과 달리 말레이시아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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