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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raveler

여든한 살 어머니와 아들의 순례길

영화감독 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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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2년 08월 호

히말라야의 까그베니 마을, 파미르 고원의 랑가르 마을, 미얀마의 인레 호수, 한겨울의 바이칼 호수까지. 정형민 감독의 동행자는 여든이 넘어 처음 여행을 시작한 어머니다. 묵직한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단단하고 결연한 의지의 어머니와 영화감독 아들이 함께한 4년간의 불교 왕국 순례길.

“아들아, 다음에 또 거기 갈 때 나도 거기까지는 갈 수 있겠는데···.”
정형민 감독이 히말라야와 네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에게 들려드린 여행 이야기가 불씨가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시던 어머니의 눈빛이 호기심과 경외감으로 반짝이더니 다음 여행에 동행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히말라야로 함께 떠났던 2014년의 가을, 당시 어머니 이춘숙 씨는 여든한 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주변의 반대가 무척 심했지만 정형민 감독은 어머니가 여정을 씩씩하게 해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춘숙 씨는 여행을 위해 피트니스용 사이클을 매일 한두 시간씩 타고 한의원에서 무릎 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을 유지했다. 연세에 비해 꽤 정정한 편이긴 했는데 4000m의 고개를 여러 번 넘어 순례를 마칠 무렵에는 108배까지 거뜬히 해낼 정도였다. 정형민 감독은 순례길이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고 믿는다. 몇 천 미터를 꼬박 오르는 까그베니 마을, 알타이 산맥, 파미르 고원, 티베트 등을 갈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이춘숙 씨의 결연한 의지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늘 앞장서서 걸으셨어요. 낯선 오지에서도 두려움이 없으셨죠.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현지 아이들에 대한 친화력도 대단했고요. 한 번은 폭설로 조난 위기에 처해 5~6시간을 걸어 하산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께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자 했더니 노한 얼굴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돌아가면, 그동안 왔던 이 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는 이들의 여정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2014년 히말라야를 시작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미얀마 종단과 무스탕 순례 등을 거쳐 2017년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2만 km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무스탕 가는 길>과 <카일라스 가는 길>을 만들었다.

“2014년 히말라야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그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까그베니 마을을 떠나는 날 어머니께서 물으시더군요. ‘아들아, 우리 다음에는 어디 가노?’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 해에 현재 네팔의 영토가 된 무스탕 순례를 떠났어요. 2016년에는 보다 편안한 여행을 하시라고 미얀마로 향했습니다. 미얀마는 어머니께서 가장 사랑했던 곳이에요. 미얀마의 숲과 사람들을 참 좋아하셨죠. 아흔 살이 되실 때 미얀마의 바간에 가서 천불천탑 청소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내년이면 아흔이 되세요. 미얀마에 평화가 찾아와 꼭 다시 갈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생후 7개월의 아들과 남편을 연이어 잃고 평생 홀로 자식들을 키워온 이춘숙 씨를 보며 정형민 감독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행복을 느끼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여행이다. 여든이 넘어 사랑하는 미얀마를 만나고, 고개를 넘을 때마다 만난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어머니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정형민 감독의 저서 <디어 마더, 소멸해가는 당신을 위하여>에는 이춘숙 씨가 매일 기록한 기도와 일기를 엿볼 수 있다. 그 안에 기쁨과 행복, 사랑, 정이 넘쳐난다. 이들은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곧 인도와 라다크를 탐험하고 겨울에는 남동 알래스카와 야쿠타트를 여행할 계획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년 겨울쯤 국제영화제에 선보일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에 담길 예정이다. 이들의 여행에 모든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 에디터 김영은
  • 사진 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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