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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

이탈리아의 은둔자, 움브리아 소도시 여행

유럽 > 이탈리아

발행 2021년 09월 호

가난과 겸손의 시인이자 성자인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아시시부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스펠로, 아름다운 구시가와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오르비에토까지 기념비적이고 예술적인 건축물과 풍요로운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이탈리아 움브리아 소도시 여행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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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고향

움브리아의 주도는 페루자지만 움브리아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곳은 성자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움브리아 주의 수바시오 산(Monte Subasio) 비탈에 가볍게 내려앉은 소박하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바로 아시시다. 움브리아 평원을 달리는 버스 창문에서 올려다보는 아시시는 마치 천상의 도시인 듯 태양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난다. 오랜 세월 닦이고 닦여 매끈해진 돌이 깔린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아시시는 조용히 산책하거나 한가롭게 배회하기에 좋은 마을이다. 오랜 시간을 지키고 있는 레스토랑들 사이에서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군데군데 보인다. 아시시가 오늘날의 명성을 얻고 순례자를 비롯한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닌 평화의 성자 프란치스코 때문이다. 아시시의 부유한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추운 겨울에 입고 있던 옷을 더 가난한 이에게 벗어주고 거의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그를 따르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가 시작되었고, 이 작고 소박한 수도회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며 지금도 세상을 밝혀주고 있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코무네 광장(Piazza del Comune)을 보고 있노라면, 장중한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 여섯 개가 떠받치고 있는 미네르바 신전(Tempio di Minerva)이 시선을 끈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이 고대 로마 신전은 우아한 품격이 절로 느껴진다. 프란치스코 거리(Via San Francisco)를 따라 아시시의 최고 명소인 성 프란치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isco)으로 향한다. 성당 안에는 ‘작은 새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해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그린 조토의 연작 벽화 28장이 있다. 복층으로 구성된 이 바실리카의 지하 묘지에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다.
아시시에서 마주한 최고의 순간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 너머 황금빛 태양이 저무는 석양 무렵이다. 아시시 구시가 제일 위에 있는 로카에 오르다가 성당 맞은편에서 맞이하는 일몰이 장관이다. 성당 너머로 움브리아 평원은 평온한 저녁 노을에 물들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절대적인 고요의 풍경이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는 시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되고, 하늘의 은총이 쏟아지는 듯해 세상 가시에 찔려 생채기투성이가 된 마음이 한없이 위로를 받는 곳이 바로 성자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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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와인 향기로 가득한 고대 로마의 도시

수바시오 산 남쪽 경사면의 넓은 구릉 위에 자리 잡은 스펠로는 우아하게 비탈진 언덕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다. 아시시의 옆 동네이기도 한 이 작은 마을의 옛 이름은 히스펠룸(Hispellum)인데, 로마의 지배권을 두고 치러진 페루지네 전쟁(Perusine War)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용맹하게 싸운 군인들을 위한 보상으로 건설했다. 3개의 로마시대 석조 아치, 원형 경기장과 온천을 비롯해 스펠로 건축물의 약 80%가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되었을 정도로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온전한 로마시대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긴 세월에 걸친 풍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집집마다 활짝 만개한 꽃들이 황폐한 돌벽을 화사한 색채로 뒤덮고 있다. 골목 가득 옛 로마의 흔적뿐만 아니라 온갖 꽃향기가 가득한 것 또한 바로 스펠로만의 특징이다. 스펠로를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꽃들이 활짝 꽃을 피우는 봄과 여름 사이다. 특히 6월 성체 축일(Corpus Christi)에는 너무나 유명한 꽃축제 인피오라타(Infiorata)가 열린다. 성체 축일 전날인 토요일부터 밤을 새워 성체 축일 아침 8시까지 사람들은 길마다 꽃으로 만든 모자이크 작품으로 수를 놓는다. 날이 밝으면 그 꽃길 위로 꽃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간 예수의 몸인 ‘성체’ 행렬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 꽃길을 따라 걸으며 꽃처럼 아름답게 살고자 기원한다.
움브리아는 로마 문명이 꽃피기 전부터 와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 토스카나와 함께 중부의 와인 생산지로 명성이 높다. 풍요로운 포도밭과 초록의 올리브 밭들 덕분에 ‘이탈리아의 초록 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해 꽤 많은 와인바와 에노테카(Enoteca)를 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스펠로를 찾는 진짜 이유는 이탈리아 와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에노테카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 한가운데 마테오티 광장(Piazza Matteotti)에 있는 에노테카 프로페르지오(Enoteca Properzio)는 움브리아 와인의 천국이라 불린다. 어느 저명한 여행 잡지는 이곳을 ‘당신이 에노테카에 대해서 꿈꾸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극찬했다.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에노테카이자 움브리아 주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에노테카로 유명하다. 7대 주인장이자 그랜드 소믈리에인 로베르토(Roberto)는 8대째 가업을 이을 두 자녀와 함께 이 에노테카를 즐거운 마음으로 꾸려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낯선 동양인 여행자인 나에게 최상의 와인과 송로 파스타를 대접해주었고, 스펠로를 찾을 때마다 늘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해주는, 우정을 넘어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윤기 나는 대리석 바닥, 프로슈토 써는 기계, 풍성한 치즈와 햄, 그리고 수천 병의 와인들, 최상의 올리브 오일, 최고 품질의 모데나 발사믹, 꿀, 마멀레이드, 신선한 최상의 송로버섯 등 움브리아 지역의 전통 음식과 식재료로 가득한 프로페르지오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활기가 넘친다. 스펠로는 밤이 깊도록 와인 이야기를 나누며 풍미 가득한 움브리아의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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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향기 가득한 골목길

기차를 타고 오르비에토(Orvieto)에 도착했다. 오르비에토는 움브리아 주의 테르니(Terni) 현의 작은 코무네(Commune, 이탈리아에서 가장 기초적인 행정구역)인데, 화산 분출로 인해 응회암이 쌓인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언덕 위 정상은 평지처럼 평평해서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도시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움브리아 일대가 정복당했을 때 오르비에토는 가장 최후까지 저항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오르비에토의 첫인상은 압도적인 두오모(Duomo di Orvieto; Cattedrale di Santa Maria Assunt)가 주는 감동과 위압적인 느낌이 섞인 오묘함이다. 14세기 로만 가톨릭 양식으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며,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에 바쳐진 성당이다.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두오모 맞은편 카페에 들렀다. 카푸치노 한 잔과 부드러운 크림이 들어간 조금은 평범한 빵 하나를 주문하고 두오모와 가장 가까운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거품 가득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 두오모를 지그시 바라본다. 거대한 두오모도 이렇게 천천히 관조하는 시간과 시선 앞에서는 조금씩 움츠러들더니 비로소 마음 한가운데로 쑤욱 스며든다. 무지개처럼 화려한 색채와 모자이크 장식, 그리고 마치 떡 주무르듯 돌을 조각해낸 파케이드(Façade)가 압권이다. 조각들 속 인물의 표정이나 섬세한 장식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피렌체와 로마 사이를 이어주는 길목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오르비에토는 중세시대 큰 발전을 이루었다. 13세기 말에는 인구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특히 당시 철학의 대부라고 일컬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오늘날로 치면 신학대학에 해당하는 오르비에토의 스투디움 제네날레(Studium Generale)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1265년,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트 4세에 의해 교황을 보좌하는 신학자로 로마로 소환되기까지 오르비에토의 스투디움에서 강의한 걸로 유명하다. 오르비에토는 치타슬로우(Cittaslow), 즉 슬로푸드 운동의 회원 도시다. 특히 이곳의 트러플 파스타는 별미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인 슬로푸드 중 하나가 바로 숙성을 위해 기다림이 필요한 와인이다. 드라이하면서 복숭아 향과 적절한 신맛이 나는 오르비에토 클라시코(Orvieto Classico) 와인은 특히나 명성이 높다. 움브리아 지역 포도밭의 80%가 오르비에토에 속해 있다고 할 정도로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와인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언덕 위의 도시 오르비에토의 웅장한 두오모 위로 구름이 흐른다. 중세의 향기 가득한 도시에서 향기로운 화이트 와인 한 모금 들이켜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관조할 수 있다는 건 오르비에토 여행의 미덕이다. 서두름이 주는 건 언제나 사람 사이든, 여행이든, 삶이든 어설픈 실패였기에 치타슬로우 오르비에토에서 부디 내 여행의 속도도 좀 더 느리게 조절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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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박진명
  • 백상현(여행작가)
  • 사진 백상현(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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