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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

파시에서 흘러나오는 낭만을 품은 도시,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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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기억

아시아 > 대한민국 > 목포

발행 2020년 09월 호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전 국민의 애창곡인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본 적도 없는 목포의 향토색 짙은 항구 풍경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싱그러운 바닷바람, 유달산 봉우리의 정겨움, 포근하고도 구슬픈 정서를 간직한 목포의 어제부터 오늘까지 알알이 빛나는 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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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역에 와본 적이 있다. 그때는 진도로 넘어가기 위해서 잠시 들렀을 뿐이었다. 역 앞 기사 식당에서 먹은, 뭉텅뭉텅 썰어낸 고기를 매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양념에 버무린 제육볶음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특정한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모든 분위기, 공기, 온도가 환기되는 것처럼 내 혀끝 감각은 목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 이직한 회사에서의 첫 출장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1박 2일을 보냈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촬영 후 기차를 타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하러 역전 식당을 찾았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한 점을 흰 쌀밥 위에 얹어 그대로 입안으로 삼키자 추위와 긴장으로 움츠렸던 온몸이 따뜻한 물에 닿은 꼿꼿한 눈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 목포 여행을 준비한 기간은 꼬박 2주였다. 목포에 왔던 걸 2주 동안이나 기억해 내지 못한 몸의 감각이 목포역에 발을 딛자마자 갑자기 하나씩 되살아났다. 목포에서 내가 뱉은 첫마디는 이랬다. “어, 나 여기 와봤네.”
목포는 1493년, 조선 시대 수군의 진영인 목포진이 설치된 후 600여 년 항구도시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106일 동안 머무르며 수군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군사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한제국 시대에 비로소 목포가 개항하며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이 목포항에 집결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요인 때문에 일찍이 눈독 들여 목포의 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까지 생겨났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은 화려한 일본인 거주지역 근처에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좁은 골목에서 지냈다. 광복 이후 바다를 매립해 면적을 늘려 지역 경제 발전에 힘썼으며, 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학생이 시위에 나섰다. 당시 목포역은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궐기대회와 대책 마련에 나선 시민들이 모이던 장이었다.
가슴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고장, 목포는 사실 광복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땅이었다. 목포가 관광 명소로 떠오른 것도 최근의 일이다. 목포를 여행하며 목포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은 ‘손혜원 의원’인데, 평소 근대건축물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이 동네의 땅을 매입하면서 그 가치가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투기 의혹도 제기됐지만, 목포 원도심에 대한 관심을 모으면서 2018년에 최초로 한 동네 전체가 근대문화공간으로 지정된 뒤 관광객이 더없이 늘었다고 한다. 적산가옥과 일본식 정원, 그리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닦아놓은 도로 등 근대의 생활상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피로 얼룩진 우리네 역사를 방증하는 살아 있는 증거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목포를 찾았을 때, 또 어떤 감각으로 기억하게 될까. 떠나고 싶은 이들에겐 길이 되고 떠나온 사람에겐 설렘을 주는 곳, 이번 방문에서 나에게 목포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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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역사관 1관 건물에 난 총알 구멍. 태평양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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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역사관 1관에서는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역사관으로 향하는 계단의 경사가 유독 가파른데 보는 이가 고개를 들어 건물을 높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하는 명백한 의도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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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시내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보이는 목포 해상 케이블카.
  • 에디터 박진명
  • 사진 김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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